벨져릭  2015. 1. 22. 01:06


 

키워드: 라벤더가 핀 들판, 달빛, 향기




"라벤더가 핀 들판에 가본 적이 있소?"


그들의 머리 위로 밤이 내리고 있었다. 벨져는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릭은 나무로 만든 싸구려 컵을 들고 있었는데, 혈관에 흐르는 피처럼 은은한 향기가 허공에 퍼지고 있었다. 벨져는 자기 몫의 컵을 기울여 차를 머금었다. 혀끝에 닿았다가 혓바닥으로 스미는 차에서는 밍밍한 맛이 났다. 찻잎이 오래된 탓이었다. 컵 겉면을 비추는 불빛이 보인다. 컵 안쪽의 가장자리에서 차가 넘실거렸다. 동그란 어둠에 불빛이 섞여들어 원래의 색깔을 알 수 없었다. 벨져는 오후에 들린 마을에서 릭이 싼 값에 구입한 라벤더 찻잎을 생각했다. 나무 껍질처럼 색깔이 진했는데, 가는 끈처럼 말려 비틀어진 모양새였다. 벨져는 릭이 꺼낸 말이 찻잎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릭은 그에게 곧잘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그가 갔다왔던 명소들이나 맛있었던 음식, 재밌었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벨져는 불빛에 달아오른 릭의 양뺨을 보았다. 릭은 두 손으로 컵을 쥔 채 벨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으로는 본 적이 있다. 보라색 꽃이지. 맞나?"

"그렇소. 희귀한 색깔이지."


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는 홀든 저택에 걸린, 라벤더 꽃에 둘러싸인 여자가 그려진 그림을 떠올렸다. 벨져는 종종 그 앞에 서서 그림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림 속에 핀 꽃들이 금방이라도 바람에 흔들릴 것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벨져는 줄기가 흔들리듯 컵 위에서 너울거리는 김을 보았다. 차향이 그의 콧잔등을 감쌌다. 릭이 차를 삼키는 모습이 보인다. 약간 열린 입술 사이로 향을 머금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릭은 다시 컵을 두 손에 쥐었다. 오른쪽 팔목에 자리한 9개의 동그라미가 불빛에 반짝거렸다. 달이 그의 팔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소.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전부 라벤더로 뒤덮여 있었지. 오후의 태양이 떠있을 때였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꽃들에서 강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났소. 보라색 꽃들에 둘러싸이자 우습게도 나도 꽃이 된 기분이었지."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달모양처럼 맺혀있었다. 벨져는 꽃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향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들었다. 릭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었다.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맴돈다. 벨져가 알고 있는 라벤더는 그림에 그려진 꽃들 뿐이었다. 치마를 두르고 있는 여자와 차향이 뒤섞였다. 벨져는 그림 속의 꽃에 둘러싸인 릭을 상상했다. 오후의 태양이 안개처럼 그의 몸과 꽃들을 감싸고 있다. 바람에 꽃잎들이 흩날렸다. 릭은 라벤더 꽃잎 같이 모여든 입자들에 파묻힌 채 사라졌다. 벨져는 사라진 릭의 모습을 끝으로 생각을 멈췄다.


"그곳의 꽃향기와 라벤더 차의 향은 다른가?"


릭은 벨져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비슷하오. 다만 죽은 향을 낼 뿐이지. 벨져는 그의 말을 들으며 컵을 비웠다.



벨져는 라벤더가 핀 들판에 서있었다.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라벤더가 피어있었다.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를 부유하는 것 같았다. 달빛이 꽃잎 위로 쏟아져 내렸다. 달이 맺힌 밤이었다. 벨져는 손을 내려 꽃잎을 만져보았다. 뻣뻣하고 마른 질감이 느껴졌다. 손등을 스치는 꽃잎이 종이조가리 같았다. 벨져는 숨을 들이마셨다. 찻잎이 든 병처럼 폐속에 라벤더가 쌓였다. 꽃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족히 스무 걸음 앞에 릭이 서있었다. 그는 라벤더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의 그림자 같은 옷에 보라색 무늬가 구름 모양으로 얼룩져있었다. 벨져는 릭, 하고 그를 불렀다. 릭은 꽃에 얼굴을 파묻고 향기를 맡았다. 벨져는 저택에 걸린 그림 앞에 서있는 아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벨져는 다시 한 번 릭, 하고 불렀다. 릭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본다.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릭은 그를 보며 말했다. 벨져. 그대는 죽은 숨을 쉬고 있군.



새벽의 하늘이 얼굴을 보듬는다. 벨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밤새 피워둔 모닥불이 불씨만을 남긴 채 꺼져있었다. 몸을 덮은 모포를 걷었다.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천이 밤의 장막을 거두는 것 같았다. 벨져는 얼굴에 닿는 새벽의 바람을 느낀다. 잘게 솜털이 일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몸을 어루만졌다. 물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릭이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누워있었지만 등을 구부리고 무릎을 모은 자세는 아니었다. 벨져는 반듯하게 감긴 눈매와 옆으로 쏠린 갈색 머리카락을 본다. 걷어낸 모포를 들어 그의 몸 위에 덮었다.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져는 릭의 얼굴 위로 몸을 기울였다. 조용한 숨결이 밤하늘에 퍼지는 달빛처럼 귓가를 스친다. 벨져는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렀다.


"릭. 그곳에서 라벤더를 끌어 안았었나?"


라벤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벨져는 죽은 숨을 내쉬었다.